무언가 정하고 싶다면 산으로 떠나라(산행편) - 2번째 지리산 종주
2일차 지리산 종주 루트(벽소령 - 세석 - 장터목)




어젯밤 개미와의 동거는 끝났다.
내 몸 구석구석 이곳저곳을 기어다니면서 열심히 괴롭혔는데 내가 반응이 없어서 그런지 깊은 새벽녘이 되자 조금은 심드렁해진것 같았다.

친구는 욱신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물어본다
"야 오늘은 어디까지 갓!"
"네~ 친구님! 오늘은 장터목까지 갑니다. 천천히 걸어가자구~~"라고........말은 하지만 워낙 빨리 걷는 날 지도 스스로 잘 알테니까 천천히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을거라고 믿는다.

내 기억으론 2007년의 세석산행은 살짝 힘들었었는데 오르막 내리막을 쉴새 없는 것으로 모자라 아마 철제 계단이 더 많아서 였을꺼다.

성삼재에서 벽소령까지 오는데는
그놈의 토끼가 문제였고(얼마나 토끼봉를 원망했던지..), 세석까지의 코스는 그놈의 처녀가 문제다(처녀봉도 만만치 않은 존재) 내가 전날부터 처녀봉이 장난 아니었던걸로 기억한다고 했을때 친구의 반응은 오늘의 산행에서 왠지 모를 압박감에 첫걸음이 잘 안뗘졌을거다.

아침은 식단표에서 어제 먹었어야 했을 우동, 그것도 가쓰오 우동이다. 우리가 우동을 끓이자 주위의 시선이 몰리는 듯 했다. 이것이야 말로 일본식 된장질! 우리는 우동을 먹고나서 녹차를 양껏타서 힘들거라 예상하는 오늘의 산길에 건배한다.


일단 첫 출발은 산에게 미안하지만
카라로 시작했다. (블로그에서 특정가수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거론하다니! 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흑흑)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카라의 메들리는 우리의 첫 산행을 즐겁게 했다. 덕분에 친구와 나는 애지간한 거리는 카라의 효과 덕에 잘 오를 수 있었다. 4키로미터를 간것이 안 믿겨졌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카라의 메들리가 끝나갈 무렵 우리는 문제의 처녀봉에 다다르고 있었다.

오늘의 점심은 처녀봉에서 먹어야 하므로, 자리를 잡아서 꿀맛같은 식사를 하려면 12시 전에는 도착해줘야한다. 하지만 처녀봉까지의 산행은 절경의 연속이어서 마음이라도 안정 되었지만 철제계단의 연속이다 보니 폭신폭신한 길이 아닌 딱딱한 곳을 디디는 무릎에 적지않은 무리가 가해졌다.



세석으로 향하는 길은 절경도 절경이지만 멋진 기암괴석들도 종종 눈에 띈다.


하늘 높은줄 모르고 끝이 없는 철제계단

철제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내 마음은 약간은 심드렁해졌다. 이곳에 인위적인 철제계단을 놓으니 물론 산행을 하기엔 많이 편하겠지만, 자연을 거슬르는 것이라 결국은 일장일단이었다. 폭폭한 흙길의 산은 사람을 따스하게 안아주려 노력하는데 딱딱하기 그지없는 인위적인 길은 산이 우릴 밀어내는 기분이 들었다.
철제계단을 다 올라서 한 바위가 나와 잠시 쉬기로 했다. 우리가 쉬고 있으니 몇몇분들이 우리를 계속 지나가는데 대부분이 산장에서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아저씨가 우리 옆으로 쓱 지나가시길래 어디까지 가시냐 물어보니 오늘 하루에 종주를 끝낸다고 하신다. 우린 깜짝놀라 그럼 어디서 오셨냐니까 새벽에 성삼재에서 출발하셨단다. 이.럴.수.가 우리는 여길 2박 3일로 올라오는데도 이렇게 골골거리는데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래, 남자면 이해할 수 있어! 근데 다음에 오는 아줌마는 대체 뭐야!!?
홀로 폴폴 뛰어다니며 아저씨 뒤로 아줌마가 나타났다. 아줌마는 난 산행을 하루만에 주파해버리는데 자신이 소속한 산악회는 일정이 맞지 않는다고 대절한 버스를 타고 싶으면 알아서 하라 해서 두고보자는 식으로 하루만에 주파해 버리시겠다고 했다. 근데 누가봐도 그 아주머니는 주파하고 말았을꺼다. 산을 타는게 아니라 흐르는 듯한 속도로 주파하셨으니까.

우리는 육포를 씹으면서 대단한 사람들을 만나고 만날때마다 고소한 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에잇. 우리도 이렇게 있을 수 없지! 다시 걷자!


왠지 이사진을 보니까...

이때가 생각나는구나(2007년 산행때)


이제 이곳만 넘어가면 세석평전이다!

우리는 그렇게 처녀봉을 지나 기암괴석들을 돌고 도니 세석평전이 저만치 보이는 진달래 밭에 도착할 수 있었다. 5월의 진달래는 피고 지는 시기가 아니라 이곳에선 이제 피는 시기다. 3월 말, 혹은 4월 말까지도 눈 덮여있는 곳이 이곳이니까.


여름이 되면 저곳에 녹음이 짙게 베어든다(2007년 산행, 여름)


친구는 약간 뒤쳐져서 저만치서 먼저 따라오라고 하고 혼자 산행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 이유중 하나가 자기만의 페이스를 유지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또 한가지의 이유는 이 광활하고 멋진 산에서 조용히 자기만의 생각을 갖게 하려는 이유였다. 같이 있게되면 서로 배려하느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으니까.
이 산에 온 목적이 뭔가?
뭔가 정하기 위해서 온게 아니었나? 친구는 앞으로 대학생활을 결산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산행이었고 난 앞으로의 6개월을 어떻게 보낼지 기로에서 침을 퉤 뱉어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속마음을 서로 알고 배려하기로 했다.



무사히 세석 대피소에 도착했다

"야! 조금만 힘내 거의 다왔어!!! 여기만 지나면 세석 대피소다!"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저 멀리서 뒤뚱뒤뚱 걸어온다. 뭔가 찡했지만 아직은 수고했다고 말해주기 일러 꾹 참았다. 우리는 세석 대피소에 도착해 신나게 라면을 끓였다.

다행히 자리를 잘 잡고 있어서 한 평상 자체를 우리 차지로 할 수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우리랑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따라오던 일행이 세석에 도착하면 자리를 주기 위함이었다.
"아저씨 아주머니랑, 그 아저씨 일행 올때가 되었는데" 하며 물을 끓이고 있는데 저 멀리서 그 일행이 나타났다. 어제 우리랑 같이 벽소령에서 묵은 부부다.

그 부부를 멀리서 지켜보면서 "우리도 나중에 나이먹고 저렇게 다녀야 하는데..."하며 생각이 잠기게 할 만큼 롤모델 부부였는데 우리 평상에 자리가 남아 이쪽으로 오시라 했다.

잘생긴 학생들이 여기까지 잘 왔네 하시면서 아주머니는 밥을 준비하시고 아저씨는 불을 준비하신다. 부부는 우리또래의 아들을 두었고 아주머니는 3달동안을 혼자 남미를 여행하신 대단하신 분, 이번여행은 그때 체력으로 금방 주파할수도 있었으나 지리산을 천천히 느껴보고 싶어서 2박 3일 종주를 선택했다고 하신다.

"근데 아주머니 혹시 우리랑 같이 묵었던 아저씨 2분 헐떡대는거 못 보셨어요? 분명 우리보다 빨리 출발했는데.." 하며 아저씨들의 근황을 묻자 이제 곧 도착할꺼라고 했다. 그말이 끝나자마 보이는 검은색 등산복 미확인 두물체, 땀에 흠뻑 젖어서 저멀리 도착한 아저씨 일행이 두리번 거리고 있다. "아저씨들! 수고하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지리산 이틀만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고 오며 가며 많이들 친해졌다. 아저씨들은 "학생들 아까 갈때 우리가 샘물에서 쉬고 있으니까 어디서 막 카라노래가 나오는거야 그 있잖아 락큐빡세 그거랑 허니~허니~ 하는 노래 그거 들으니까 진짜 힘나더라, 이따가도 좀 부탁해~" 하며 여독을 푼다.

아저씨 일행과 부부는 오늘도 우리와 코스가 같다. 장터목까지의 코스인데 부부는 어쨌든 여기서 장터목은 어제의 연하천과 벽소령 거리와 비슷비슷하니까 천천히 세석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가겠다고 하시고 아저씨 일행은 일찍 출발해 그곳에서 쉬겠다고 하신다. 우리도 잠시 쉬고 일찍 출발해 천천히 가는 쪽을 택했다.

아름답게 잘 꾸며놓은 세석 대피소를 떠나 아래를 굽어보니 세석평전에 마치 심어져 있는 듯한 대피소가 참 아름다웠다.

"아저씨! 아주머니! 다들 이따가 봐요~~~"



세석평전도 이제 안녕~

멀어져가는 세석평전을 뒤로하고 우리가 마주한 곳은 몇몇 봉우리였다. 조금만 더 가면 나오는 촛대봉은 세석평전에서 천왕봉까지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출의 차선책으로 촛대봉에서 보는 일출도 기가 막히다고 한다.


국립공원 직원인지 모르겠지만 촛대봉 근처에서 열심히 안테나 수신율을 보고 있었다
(힘드시겠다..여기까지 올라와서)

친구가 계속해서 뒤쳐지는 나머지 우리는 촛대봉에서 무한정 쉬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촛대봉을 지나고 촛대봉에서 천왕봉을 짚어보고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다. 그러나 살짝 눈이 찌푸려지는 것은 많은 산악회가 왔다갔다 하면서 서로의 독사진을 찍겠다고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양해의 말도 없이 좀 비켜주세요 식의 막무가내 말로 몰아내듯 하니 입장이 좀 그랬다. DSLR을 부여잡고 추억을 담는것은 이해하지만 저 산악회 사람들은 산을 정복하려 온 것인가? 그저 높이 올라왔다는 그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서? 아마 그렇다면 지리산 종주라고 하기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지리산을 왜 종주하는가? 단순히 천왕봉을 올라 성취감을 맛보겠다면 백무동에서 올라와 천왕봉을 찍고 중산리로 가든 그 역으로 가든 하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코스가 길든 짧든 어쨌든 산을 느끼는데는 차이가 없지만 저 분들은 그 기나긴 코스를 종.주 하시면서 산을 느끼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어보여 안타깝기만 했다.

에효 괜한 생각일까,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나는 나지...

아무튼 아주머니 산악회가 어서 내려가길 바라며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난다. 여기서 장터목까지 가려면 적어도 오르막은 2번이요, 유격훈련 같이 밧줄을 잡고 올라서는게 몇번 있던걸로 아는데, 친구가 잘 버텨줄까 살짝은 걱정스럽다. 그래도 믿어본다. 친구는 전방 GOP에서 근무했던 애니까 일개 팔공산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한 내 체력보단 나을거다.(그러나 산행은 역시 체력보다 지구력, 그리고 요령이다..)


사진 뒷편으로 보이는 제일 높은 봉이 천왕봉이다 이곳에서는 장터목까지 보인다

촛대봉의 풍경



장터목으로 흐르는 길은 잘 다져져있다.



봉우리를 넘고 옆으로 감싸고 돌고 하다보니 이제 나도 다리에 무리가 오기 시작한다. 장터목으로 흐르는 길은 완만한 평지와 암석길이 많아 완만한 곳에서는 편히 쉬어줘야 하고 완만한 곳에서는 관절을 잘 이용해 무리가 가지 않게 타야한다. 폴짝폴짝 가야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마지막 연하봉을 지나니 이제 장터목이 저 멀리 봉우리에 걸려있는게 눈에 들어온다 고지가 눈 앞에 있으니 오히려 힘이 든다. 걸으면 걸을수록 계속 닿을 수가 없으니. 친구와 나는 봉우리를 넘고 암석을 넘고 넘는데 나는 바짓 똥꾸멍 부분이 아주 심하게 민망하게 그리고 섹시하게 찢어져버렸고..(부욱~ 하고 소리나서 놀랬다!), 친구는 계속햇 뒤쳐진다. 결국 고지를 눈앞에 두고 한번 더 쉬기로 했다. 뭐 어쩌피 천천히 가기로 했으니깐.

쉬고 있는 동안 고등학교 친구들과도 전화하고 고등학교때 담임선생님(고등학교 졸업한지 벌써 5년이 지났다)과도 연락했다. 오늘이 5월 15일 스승의 날인데 우린 선생님 만나뵈러 가지 않고 여기있다니, 조금은 죄송하긴 했지만 우릴 이해해주실거다 3년동안 고등학교 내내 우리 담임선생님이었으니까 아주 잘 아시겠지 우리의 성향을. (동행한 친구도 고등학교 죽마고우다) 그리고 간만에 부대에도 연락해 내 근황을 알렸다.

다시 출발하고 머지않아 우리는 장터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 우리가 아니구나.
나만. 도착할 수 있었다. 친구는 중간에서 천천히 오라고 하고 먼저 내려왔다.

장터목에 들어서니 아까 세석에서 만난 모든 일행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쉬고 쉬는동안 우리르 앞질러 갔나보다.

"어 근데 왜 학생만 있어? 친구는?"
"친구 버리고 왔어요 하하하하"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

머지 않아 친구가 저 멀리서 온다.
'친구야 난 널 정말 버린게 아니야~~~ 흑흑'


"수고했다 임마!!"
이제 우리 모두 장터목까지는 무사히 왔다. 천왕봉까지는 적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 남았으니 문제없다. 그저 에어졸을 열심히 뿌리며 여기까지 와준 친구가 고마울 뿐이다.

우리는 어제 벽소령에서 추위 떨며 먹는 김치찌게의 과오는 범하지 말자 하며 취사장에서 저녁을 빨리 해치우기로 했다(16:30분경이다) 원래는 밖에서 먹기로 했는데 벌레가 자꾸만 카미가제처럼 끓이는 물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괜한 추가 단백질 공급원이 될까, 취사장에서 어제의 김치찌게를 해먹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 맛있어서 우리와 같이 왔던 아저씨 일행과, 부부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치찌게를 일부러 넉넉히 끓였어요, 맛있을지 모르겠지만 드세요~" 하면서 물량공세를 했더니 아주머니는 맛있는 오이를, 아저씨 일행은 안주가 될만한 김을 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안주삼아 소주를 한병씩 비웠다. 

그러면서 우리네 옛날 고등학교 이야기도 하고 인생얘기도 하며 즐거운 밤을 보냈다. 
장터목으로 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격려를 받았으며 온기를 느꼈다. 모르는 우리에게 초콜렛이며 오이며 많은 사람들이 건네주었고 그안에서 온기를 느낀것이었다. 이래서 산행은 제맛이다. 우리에게 온기를 느끼게 해주고 홀연히 떠난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은 어느새 다른 산행객에게 베풀고 있다. 어느새.

장터목에 계획없이 올라온 아주머니를 위해 대피소에서 잘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것과 잘될거라고 위안을 주는것 그것밖에 없었지만 우리도 그도 모두 온기를 느끼기엔 충분했을거다. 

내일은 일출을 볼 수 있을까? 녹차를 마시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듬성듬성 별이 보이고 아래에는 중산리가 멋지게 펼쳐져 있는 것으로 봐선 천왕봉은 기꺼이 정상을 품을 수 있게 해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내일 출발 시각은 새벽 3시 30분. 산악회가 동시에 올라가니 우리는 그보다 더 먼저 올라가기로 한다. 

일출시각은 새벽 5시 25분이다.




세석 평전으로 가는 아름다운 고개

날짜

2010. 8. 9. 15:51

최근 게시글

최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