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 (28/05/2014)
S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론세바스예스)
사진은 손을 쓸 수도 없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었다. 하나씩 하나씩 지워져 ... 이미 사진이 다 지워진 뒤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 .
다른 사진들은 그렇다치고.. 파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찍었던 영상들은 어쩌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일단 살려야만 했다.
모두가 자는 사이, 어떤 아저씨가 코를 골아대는 메들리에 맞춰 내 머리속은 매우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모든 파일을 살려낼것인가..
분명 파일을 살려낼 수 있지는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고민만 했던 밤은 지나고 야속하게도 아침은 밝았다.
빵 한조각과 바나나 그리고 소시지와 고기가 나온 아침. 특별할 것 없는 비싼 아침식사였다. 기분도 영 좋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인에게 물어물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간단한 복구 유틸리티를 다운받아 돌려보려고 했으나 사용자 권한이 없다고 뜨더라.
아무래도 파일을 전부 복구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다. 한숨을 푹 쉬고 있으니 Sabina가 물어봤다.
"로이 무슨 일이 있는거야?"
나는 답했다. "그게 말야 어제 저녁에 파일을 백업하려다가 파일이 전부 다 날아가버렸어"
"헉!!!"
일단은 복구를 위해서는 큰 도시를 들러야 한다. 이 다음에 들르게 될 큰 도시는 팜플로냐라는 곳이었다. 분명 어딘가는 PC방 같은 것이 있기를 바라면서...
Sabina는 "내 카메라로 찍으면 되는데 뭐가 걱정이야"라고 다독였고,
데이빗은 "꼭 살릴 수 있어!" 라고 힘을 줬다.
그렇지만.. 영상을 남기지 못할 것 같아 그점이 제일 아쉬웠다. 어떻게 참는담. 앞으로 적어도 3일은 더 가야할 것 같은데...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서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기분도 꿀꿀한데 비까지 내리다니.. 그래도 애써 기분 좋은 척을 하며 피레네로 향했다. 피레네로 올라가는 길목을 찾기는 쉽지 않다. 화살표를 하나만 쭉 따라가니 아.. 이렇게 길을 찾을 수 있구나 하는걸 체득할 수 있었다.
다리를 지나
초입으로 들어선다. 두 갈래길이 있는데 왼쪽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일반적인 루트(풍경이 멋있다고 해서 자주 가는 오리손 길 혹은 나폴레옹길이라고 부른다). 오른쪽은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루트(발칼로스루트)그러나 좀 더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한다.
Sabina가 가지고 있는 노란 가이드북에 의하면, 왼쪽길이 시간은 오래걸리지만 오리손을 지나는 길이 풍경이 아름답다고 적혀있단다. 그렇다면 그대로 꼬우.
미국인 Daniel은 정신없이 옆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조잘대고 있다. 이쪽으로 가면 공룡이 나온다는 그런 말까지 하는거보면 일단 DNA가 그런듯하다.
풍경은 정말 멋있었다. 이럴때를 대비해서 1회용 우비를 가져왔으니 망정이지. 우비까지 없었으면 큰일날뻔..
피레네.. 그냥 넘는것도 힘든데.. 비까지 오면 대체 어떻게 하라는건지.. 올라가는 길은 높고도 험하고.. 또 아득하다.
일단 첫번째 목적지는 오리손이다. 직선거리상 별로 멀지 않았는데 경사가 너무 높아서인지 쉽지 않다.
피레네에서 보는 모든 것들. 뭔가 삶이 태동함을 느낀다.
오리손에는 산장이 하나 있다. 일단 크레덴시알(여권)에 도장을 찍어야 하니까 첫번째를 도장을 개시!
이 산장도 좋지만, 조금만 더 올라가면 언덕 중턱에 위치한 자그마한 까페가 또 있다. 이 곳 까페는 정말 비싸지만 아침에 아름다운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이곳만한 곳이 없기로 정평이 난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콜라 2개와 물 한잔을 시키고 나서 하염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정상을 바라본다.
도대체 저곳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지.. 벌써부터 앞이 깜깜하다.
오리손의 까페에는 아주 영리한 개가 한마리 있다. 개가 갑자기 다니엘에게로 가더니 잎에 물고 있던 나뭇가지를 그의 무릎앞에 놓고 그의 눈을 주시한다.
대체 뭘 원하는거지? 화났나?
궁금해했는데, 왠지 그 개가 같이 놀아달라는 걸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다니엘에게 "그 나뭇가지를 던져봐 그러면 왠지 물어올 것 같은데?"라고 했다.
그랬더니 혹시나가 역시나!
그 강아지는 나뭇가지를 물어와 똑같은 행동을 했다.
아마도 같이 놀아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다니엘이 놀아주는 걸 잠깐 멈추니 이번엔 하시모토 상에게로 가서 똑같은 포즈를 취한다.
오리손의 멍멍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여정이 많이 남았기에 계속 가야만 한다.
비가 잠시 멈췄다가 부슬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우비를 입자마자 엄청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고 ..
높이가 가늠되지 않는 언덕을 계속 넘고 넘으니 어느새 모든 옷가지가 죄다 젖고 말았다. 비가 눈 앞을 가려 앞이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 데이빗은 벌써 무릎에 무리가 왔고, 사비나는 어깨에 무리가 왔다고 했다.
정말 풍경은 멋지고..
사진상으로는 멋진 트레킹 루트를 걷고 있구나 생각하시겠지만..
우리는 쉬지 않고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고 있고
비에 호되게 당하며 피레네를 힘겹게 오르고 있다.
오늘 안에 모두 론세바스예스까지 갈 수 있을지 심각하게 걱정이 된다. 중간중간 언덕을 넘어가며 줄지어 가는 무리가 보인다. 어느새 안개가 자욱히 끼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을땐 조금 무섭다. 누가 앞에 있는지 조차 보이지 않으니까.
다른 여행자들을 신경쓸 겨를이 없다고 봐야할까. 모두들 제각기 눈앞에 세차게 불어닥치는 비바람과 싸우며 계속 그렇게 전진하고 있다. 그저 앞만 향하는 노란 화살표가 야속할 뿐이다.
오.. 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