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언제냐고 물어본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2005년 12월 12일이요."
신기하게도 여지껏 여행이라 하면 그냥 떠나는 것만으로만 생각했었지 마음을 정리한다던지 무엇을 마무리 한다던지 하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이 목적 없는 단지 놀이문화에 익숙해진 우리네 대학교 엠티같은 것이었다.
재수라는 큰 고비를 넘기고 나니 해냈다는 생각보다는 막연한 걱정 부터 앞섰다.
1년여간 재수를 준비하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이닥친 수능에선 본 실력은 커녕 그 반도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착잡, 막연 그 자체였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부모님이 환대하며 "준영아 시험은 잘 봤어??" 라는 인사를 듣자 마자 "몰라..." 한마디 내뱉고 방으로 틀어박혀 하루 종일을 울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흘러 고민도 흘러갈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목숨을 걸었던 모든것이 끝났어.
답답하고 해결할 생각조차 나지 않아.. 모든게 복잡했다.
이 답답함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드라마에서 보니 ‘아 잡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바다에 가야겠어’라는 식의 미사여구가 그득한 여행을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한번도 가본적 없는 그곳을 향한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게 내 인생을 바꿔줄 여행의 시작이라고 누가 감히 예상할 수 있었을까, 철저히 동경으로 부터 시작된것이었다.
‘ 부모님 4일만 생각할 시간을 갖고 돌아오겠습니다’ 포스트잇을 한 장 써서 뜯어놓고 내 수중에 들려진 9만원을 들고 배낭과 시디피만을 달랑 들고 청량리역으로 떠났다.
떠나는날 여기저기서 반응이 왔다.
"추운데 어딜가요? "
"폭포도 얼어있을걸요?"
"코스가 약간 무리다.."
"송강정철 되시게요?" 등등...
그렇지만 강행했다.
CDP에 여행폴더를 만들고 노래를 넣고 그렇게 배낭하나 짊어지고 유유자적 하는 것 처럼..
그날 밤.. 나는 유유히 청량리 역을 향해 출발했다.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국수집은 바로 저기 보이는 가게
몇년만의 폭설이 내리칠거라는 말에 따듯하게 입고 왔는데도 세상은 정말 싸늘했다.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사람 하나 없는 적막함에 왜 내가 여행을 감행했을까 하는 약간의 후회도 밀려왔다. 일단은 배가 고프니 뭔가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리자 싶어 청량리역 아래에 있는 간단한 잔치국수집을 먹었다. 어떻게 보면 그냥 내오는 인스턴트일수도 있고 정성이 담긴 음식일수도 있다. 이러나 저러나 모든것을 떠나 그렇게 추운날에 잔치국수 한그릇은 정말 마음속까지 따듯했다. 왠지 날 위로해주는 듯 했다.
그렇게 감상젖은 국수를 먹고 발매창구로 승차권을 받으러 갔다. 승차권을 미리 예약해 둔 터라 주민증만 보여주면 표를 끊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이게 웬걸!!? 대리자 등록이 되어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날벼락이 있나!! 분명 대리자 등록을 해놓고 나왔는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취해도 먹히지가 않아서 역안에 있는 피씨방을 이용하기로 했다. 근데
" 10분에 500원 "이라니..
정말 말도안돼는 금액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에있는 친구에게 내 아이디를 알려주고 대리자 등록을 해놓으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간신히 가까스로 표를 발급 할 수 있었다.
곧있으면 승차시간!
그런데 무료하게 그냥 갈 수가 없어 맥주한캔과 과자를 사기로 했다.
오징어는 돈이 없어 과자로, 맥주도 제일 저렴한 것이다
자 출발하자!
천천히 나를 등에 업고 출발하는 이 주황색 열차는 서서히 목적지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 철컹철컹 하는 리듬과 함께 세상을 향해 물들어가는 것 처럼 창밖도 하나씩 밤의 풍경과 아련한 전조등, 그리고 거리의 불빛과 함께,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눈을 감으면 상상되는 실루엣 처럼 지나가는 강릉의 풍경들.. 마음속에 펼쳐지는 강원도의 푸르름 .. 그 설렘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출발하면서 역을 하나..둘 스쳐지나갈 때 마다 설레임은 하나둘.. 증폭되기 시작했다.
한.. 태백시쯤 왔을까? 조용한 분위기의 도시의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30년대의 뉴욕을 보는것 같은 조용하지만 새로움을 준비하는 느낌. 여기저기 증기가 솟아나온다.
얼마가지 않아 곧이어 이런 방송이 나온다 "지금부터 국내 유일의 스위치백 구간에 도착하게 됩니다. 앞으로 5분동안은 기차가 스위치백을 시도하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그러면서 정말로 뒤로 갔다가 앞으로 갔다가 지그재그로 산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지그재그 스위치백을 지나 서서히 다시 어둠이 쌓인 마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마을풍경이 참 인상깊다. 바로 도계라는 탄광촌인데 밤에 불빛이 옹기종기 산 중턱에 위치해 있어 무슨 동막골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도계를 지나서 한 30분쯤 갔을까? 동해가 보이기 시작한다.
와! 동해다 동해! 근데 바다 끝에 보이는 저 하얀 불빛은 다 뭐지? 혹시 무장공비?그들의 정체는 알고보니 오징어잡이 배였다. 참 많은 오징어잡이 배가 이른 새벽부터 싱싱한 오징어를 잡고 있었다. 그런 신기함도 잠시 벌써 정동진에 다 왔다는 방송이 나오기 시작한다.
" 동해역 다음역은 정동진역입니다. 정동진역에 내리실 손님은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도착이다 정동진에...!
새벽 4시 37분.
내 첫 여행의 설렘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정동진에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