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수목원을 떠나 인흥마을로 접어드는 길.
창밖에 조그맣게 맺히다 떨어지지 않는 비를 보아하니 날씨는 금새 개일 것 같았다.
인흥마을은 남평문씨 본리세거지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우는 곳이다.
언뜻 겉모습만 봐서는 안동 하회마을에 들어가는 초입같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하늘을 바라보니 날이 싸악 개어있다.
기분 좋은 하루다.
마을 초입에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에 혼자서 들어가는것 보다는 해설사님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을 추천한다. 어찌보면 그것이 마을 사람에 대한 예의이기도 할 듯 싶다. 사람이 사는 마을이다 보니 이곳저곳 집안을 들락날락 해야하므로, 반드시 해설사님을 통해 가도록 하자.
미소가 매력적이신 김주명 해설사님(http://blog.daum.net/sisarang1992) 해설사님을 뵙자마자 또 즐거운 여행이 되겠구나 설렌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신 해설사님의 첫번째 설명은 이곳이 남평문씨의 거주지라는 것과 문희갑 前대구시장이 남평문씨 가문이라는 것. 원래는 인흥사 터가 있었던 부근을 설명하고 계시는 중이다.
"여러분 이곳은 인흥마을입니다. 저기 보이는 탑은 무슨 탑일까요?"
"인흥탑이요~"
"그렇죠 인흥사 석탑입니다"
"이곳은 절이 있던 터입니다. 그럼 그 절 이름은?"
"인흥사요!"
말을 풀어가는 솜씨가 역시 해설사님 답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위치하고, 아름다운 시골길에 위치한 전통마을, 문익점 선생의 후손들이 정전법에 의해 구획을 정리하고 계획한 세거지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문중문고인 인수문고와 다양한 부속건물. 광거당과 수봉정사로 꽤 알려져있는 곳이다. 최근에는 문희갑 前대구시장에 의해 광거당에서 음악회를 하기도 했다.
인흥사라는 것을 알려주는 인흥석탑 앞에는 인흥사의 와편들이 많이 보인다.
우리는 와편조각 하나에도 역사의 숨결을 하나하나 찾아나간다
인흥마을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있다. 잊지 말자. 이곳은 민속마을이기 이전에 사람이 정말로 살고 있는 주거지다.
(관람하실 분들에게 : 먼저 관광안내소의 문화관광해설사에게 문의하십시오. 관람시간은 10시부터 18시 이오니 시간을 지켜주시고 관람시에는 조용히 관람 부탁드립니다)
이제 서울에서는 북촌쯤은 가야 볼 수 있는 한옥집들이다.
여름에 여기에 앉아 바람을 쐬면 이보다 행복할 수 없겠다.
반드시 해설사님을 통해서 방문하셔야 합니다.
해설사님은 따로 블로그도 운영하고 계셔요
(http://blog.daum.net/sisarang1992)
참고자료 : [名士의 귀향별곡] 대구 달성 인흥마을 문태갑 前서울신문 사장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303026010
인흥마을은 (달성2)를 타고 본리 1리에서 하차하면 된다. 하차지점에 수령 300년의 거대한 팽나무가 서있기 때문에
정류장을 놓칠일은 없을 거예요~
우리는 와편조각 하나에도 역사의 숨결을 하나하나 찾아나간다
인흥마을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있다. 잊지 말자. 이곳은 민속마을이기 이전에 사람이 정말로 살고 있는 주거지다.
(관람하실 분들에게 : 먼저 관광안내소의 문화관광해설사에게 문의하십시오. 관람시간은 10시부터 18시 이오니 시간을 지켜주시고 관람시에는 조용히 관람 부탁드립니다)
이제 서울에서는 북촌쯤은 가야 볼 수 있는 한옥집들이다.
여름에 여기에 앉아 바람을 쐬면 이보다 행복할 수 없겠다.
우리가 들어선 곳은 수백정사였다. 수백정사에 들어서니 맨 앞에 보이는 편액. 수백당이라고 쓰여져 있다. 하얀것을 지키자. 우리에게 하얀것은 무엇일까?
정말이지 기와며 돌담이며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
인흥마을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오어사에서 와 중창하여 인흥사라 하고 인흥사지에 지어진 곳이다. 그 후 문익점 선생의 후손들이 집을 지으며 집성촌으로 발전하였고 그 후손 문영박(1880~1930)의 아들들이 분가해 한 동네를 이루면서 아홉살림과 두개의 재실이 들어섰다. 그 재실중 하나가 광거당이고, 바로 이 수봉정사다.
수봉정사는 1936년에 후손의 교육을 위하여 건립한 서당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5칸은 방, 앞의 6칸은 마루를, 1칸은 누마루를 만들었다. 원주는 궁궐과 관청, 사찰건물에 사용하였는데 수봉정사는 7개의 굵직한 원주를 세웠다.
이곳 빗장둔태나 귀석을 잘 보면 상징적인 그림들이 있다. 거북이가 특히 많은데 이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것 같다.
자아! 무병장수 합시다!
곧 이어 우리는 인수문고 출입문을 열고 인수문고로 들어섰다.
그래서 보통 만권당 (萬卷堂)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 나라 서원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 안동의 도산서원으로 알려졌는데, 도산서원이 약4400 권을 보관하고 있으므로, 인수문고는 도산서원보다 거의 2 배 이상 책을 보관하고 있는 셈이다. 인수문고는 장서의 양뿐만 아니라, 어느 책도 책의 권수가 하나도 빠지지 않은 낙질(落帙)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어느 책도 낱권이 아닌 전집으로 완벽히 갖추고 있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문중문고이다.
지금 인수문고는 후손인 문태갑 前국회의원이시자 서울신문 사장님이 관리하고 계신다. 우리가 인수문고를 나설즈음 멀리서 "너희들 어디서 왔니"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희는 한국관광공사에서 기자단으로 대구 구석구석 여행지를 취재하고 있어요"라고 말씀드리자
"이곳은 볼것이 참 많으니 많이 둘러보고 가~" 라고 격려해주셨다.
83세에 접어드셨다고 들었는데 매우 건강해보이셨고,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시는게 내심 부럽기도 했다.
자아! 무병장수 합시다!
위창 오세창 선생의 편액(편액마다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곧 이어 우리는 인수문고 출입문을 열고 인수문고로 들어섰다.
남평 문씨 집안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서를 가지고 있는 집안으로 알려졌다. 남평 문씨는 인수문고라는 특별한 문고를 갖고 있다. 현재 인수문고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 종류가 약 8500 여 권에 달한다. 보통 고서의 경우에는 1 책이 2-3 권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약 2만 권에 해당한다.
그래서 보통 만권당 (萬卷堂)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 나라 서원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 안동의 도산서원으로 알려졌는데, 도산서원이 약4400 권을 보관하고 있으므로, 인수문고는 도산서원보다 거의 2 배 이상 책을 보관하고 있는 셈이다. 인수문고는 장서의 양뿐만 아니라, 어느 책도 책의 권수가 하나도 빠지지 않은 낙질(落帙)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어느 책도 낱권이 아닌 전집으로 완벽히 갖추고 있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문중문고이다.
인수문고의 기반이 되는 만권당의 설립 시기는 경술국치를 당한 1910 년 무렵이다. 나라가 망하던 시기에 설립된 문고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 26대 충선왕이 임금자리에서 물러나고 나서, 원나라 수도 연경의 저택에서 만권당을 짓고 많은 서적을 수집하였다.
고려에서 학자 이재현을 불러와 중국의 학자들과 더불어 학문적으로 교류하면서, 고려 유학의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아마 인수문고도 망국의 아픔을 책으로 달래고 문화를 일으켜서, 다시 나라의 주권을 되찾아보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만권당을 세워는 지도 모른다.
만권당은 집안의 자녀 교육을 위하여 설립되었다. 남평 문씨 집안에서는 일본이 세운 신식 학교에서 자녀들을 교육시키지 않았다. 일본 사람이 세운 학교에 자녀를 보내면, 결국 자녀들도 일본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그 당시 자녀들에게 전통 서당 교육을 고수하였다. 만권당은 집안 자녀들을 위하여 설립한 사립 학교이며 도서관이고, 일본 침략에 대항하는 정신적인 의지의 상징이다.
인수문고는 1981 년 정부 보조를 받고, 수봉정사 옆 공터에 별도의 건물을 마련해서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자리에 중곡문고(中谷文庫)라는 또 하나의 문고가 추가되었다. 인수문고는 고서를 중심으로 모았는데 비해서, 중곡문고는 최근에 출판된 책을 중심으로, 5000 권 이상을 모아서 보관하고 있다.
지금 인수문고는 후손인 문태갑 前국회의원이시자 서울신문 사장님이 관리하고 계신다. 우리가 인수문고를 나설즈음 멀리서 "너희들 어디서 왔니"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희는 한국관광공사에서 기자단으로 대구 구석구석 여행지를 취재하고 있어요"라고 말씀드리자
"이곳은 볼것이 참 많으니 많이 둘러보고 가~" 라고 격려해주셨다.
83세에 접어드셨다고 들었는데 매우 건강해보이셨고,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시는게 내심 부럽기도 했다.
우리는 돌담을 지나 광거당으로 왔다. 남평문씨 세거지의 광거당은 정면 5칸의 ㄱ형 건물로 중층 누마루를 내었다. 대묵을 열면 행랑채와 광거당을 분리해주는 토석 헛담이 나타나며 진흑과 기와를 겹겹이 쌓은 헛담에는 기와조각으로 꽃 한 송이가 새겨져있다. 광거당 정면에는 석촌 윤용구가 쓴 광거당. 누마루 정면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수석노태지관>이라는 편액과 누마루 안쪽에는 <고산경행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이날 이곳에 기거하는 가족들이 방문자인 우리에게 마루를 내어주셔서 누워보기도 하고 윗 사진이 보이는 곳에 앉아 사람에 사르르 흔들리는 대나무 숲의 소리를 들으면서 행복을 만끽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피리소리도 너무 듣기 좋았다.
이날 이곳에 기거하는 가족들이 방문자인 우리에게 마루를 내어주셔서 누워보기도 하고 윗 사진이 보이는 곳에 앉아 사람에 사르르 흔들리는 대나무 숲의 소리를 들으면서 행복을 만끽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피리소리도 너무 듣기 좋았다.
광거당 마루에서 우리 조원들 한 컷!
더욱 놀라운 것은 마을 뒷편을 따라 올라간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 있다는거였다. 아름다운 지붕이 일렬로 늘어서있고 아름다운 바람소리와 피리소리와 물소리와 새소리가 어우려져 한폭의 그림처럼 만들어진 이 곳.
수애가 나오는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연출팀이 왜 이곳을 탐냈는지 알것도 같다. 너무 아름다운 이곳을 보고 우리는 연신 사진을 찍었고 감탄사를 잊을 수 없었다.
해설사님 曰
"어디서든 찍어도 작품이 나오는 곳"이라고 하셨다. 그야말로 인흥마을의 핫 플레이스다!
수애가 나오는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연출팀이 왜 이곳을 탐냈는지 알것도 같다. 너무 아름다운 이곳을 보고 우리는 연신 사진을 찍었고 감탄사를 잊을 수 없었다.
해설사님 曰
"어디서든 찍어도 작품이 나오는 곳"이라고 하셨다. 그야말로 인흥마을의 핫 플레이스다!
인흥마을 끝자락에서 맛있고 시원한 김치말이 국수를 먹고 나서 바람을 느끼며 인흥마을을 떠나는 길.
한창 익고 있는 벼는 바람을 따라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줬고
인흥마을의 대나무숲은 시원한 바람을 켜켜이 지나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바람이 스치며 마음이 스미는 이 곳.
문득 이런 욕망이 들었다.
저기 저 인수문고에 있는 책을 읽는다는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책만 읽다가 여생을 보내면 좋지 않을까?
몸도 마음도 깨끗해질 것 같은데 말야.
나는 이날 부로 인흥마을을 마음 깊숙이 우러나와 사랑하게 되었다.
다음에는 또 다시 방문해서
그때의 그 바람을 느낄 수 있고 마음이 스미는 아름다움을 또 한번 마주할 수 있도록.
지금처럼 아름답게 남아줘 있었으면 좋겠다.
인흥마을은 오전 10시부터 18시까지 관람하실 수 있고 한창 익고 있는 벼는 바람을 따라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줬고
인흥마을의 대나무숲은 시원한 바람을 켜켜이 지나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바람이 스치며 마음이 스미는 이 곳.
문득 이런 욕망이 들었다.
저기 저 인수문고에 있는 책을 읽는다는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책만 읽다가 여생을 보내면 좋지 않을까?
몸도 마음도 깨끗해질 것 같은데 말야.
나는 이날 부로 인흥마을을 마음 깊숙이 우러나와 사랑하게 되었다.
다음에는 또 다시 방문해서
그때의 그 바람을 느낄 수 있고 마음이 스미는 아름다움을 또 한번 마주할 수 있도록.
지금처럼 아름답게 남아줘 있었으면 좋겠다.
반드시 해설사님을 통해서 방문하셔야 합니다.
해설사님은 따로 블로그도 운영하고 계셔요
(http://blog.daum.net/sisarang1992)
참고자료 : [名士의 귀향별곡] 대구 달성 인흥마을 문태갑 前서울신문 사장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303026010
인흥마을은 (달성2)를 타고 본리 1리에서 하차하면 된다. 하차지점에 수령 300년의 거대한 팽나무가 서있기 때문에
정류장을 놓칠일은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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