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 할아버지께서는 8시에 온다고 하셨다. 우리가 일어난 시각은 7시.
"앗 우리 정리 안하고 있으면 혼나!"하며 모두 깨우고 아침에 맛난 고깃국과 갓담은 김치,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부터 할머니들이 돌아가면서 잘 잤냐고 물어봐주셨다.
"당연하죠! 할머니!! 너무너무 잘 잤어요!"
그리고 할머니 집에 이부자리를 돌려드리러 가는데, 생각보다 먼 거리에서 할머니 혼자 들기도 힘든 이부자리를 들고 마을회관에 오셨다는 생각을 하니 죄송했다.
"이렇게 먼곳까지 오셨어요?", "뭐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린데 뭐얼..." 가슴이 아리다.
8시에 오신 회장 할아버지는 학생들 열심히 살라며 격려의 말과 함께 시내로 나가셨다. 우리는 할아버지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마을회관을 나섰다. 이 좋은 기억이 있는 학산리를 차를 타고 스케치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가 묵었던 마을회관
"아 정말 좋은 곳이었는데 말이에요.. 생각 많이 날거 같아요" 라며 다들 아쉬워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만수무강 하세요!!!
노안면을 나서기전 마지막으로 열차가 들어오지 않는 노안역에 들르기로 한다. 갈대가 넘실대는 노안에서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찍고 인적이 없는 노안역을 잠시 들렀다가 나주로 향한다. 얼굴도 마음도 '동안'인 노안면 사람들이 마구마구 그립다.
일전에 와본 기억이 있는 곳 나주시내. 오랜만에 마주한 나주는 여전히 전통이 깊게 베어있고 아름다운 여행지다. 나주 목문화관에 들러 나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후 우리는 나주의 전체를 돌아보기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호로 지정되어있는 나주 금성관에 들렀다.
이곳은 1373년 고려 공민왕때 금성군의 정청(政廳)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익공집식 팔작지붕 형태로 규모가 꽤 크다. 안에는 슬리퍼가 구비되어 들어갈 수 있었는데, 마침 아쟁을 들고간 터라 아쟁연주를 해본다. 천장에 소리가 울려퍼지고 부딪혀 되돌아오는데 소리가 아주 청명하다. 마치 콘서트장에서 아쟁연주를 하는 것 같아 신기했다.
금성관 주위에는 문화유적인 나주 목사내아, 나주향교도 위치해있다. 나주향교는 전라남도 교동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향교로 조선시대 당시 전주부중에 두번째로 규모가 큰 고을이었기 때문에 향교규모도 컸다. 배치는 전묘후학(前墓後學)으로, 이는 일반적인 향교의 전학후묘와 달리 앞에 제향을 두는 대성전을 두고 강학을 하는 명륜당을 뒤에 두는 방법을 사용하였고, 현존하는 향교의 의미는 한국의 전통적 공립학교로써의 의미가 큰 곳이다. 이곳은 시민들의 전통혼례식장으로도 이용된다고 한다.
우리는 인근에서 간단히 커피를 한잔씩 하고 나주향교로 걸어갔는데, 향교 앞에 많은 차들이 주차하고 있었다. 향교 안이 북적북적해서 무슨 일인가 빼꼼이 쳐다보는데, 향교에서 마침 전통혼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혼례의 마지막이라 처음부터 보진 못했지만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다. 향교는 숙박도 가능하게 되어있는데 모든 하객들이 전날 이곳에서 숙박한 후 혼례에 참가한 것 같다. 전통혼례 장소가 시내 안에 있는 나주시민들이 부럽다.
일전에 향교방문 때 나만의 비밀장소가 있었다. 연못과 아름다운 풍경이 어우러진 곳이었는데, 그곳 평상에서 잠시 앉아 여행의 노곤함을 풀며 서로의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간단히 나눴다. 다들 어제 그 정이 그리운 모양이다. 할머니들이 너무 잘해주셔서, 그리고 전라도 인심이 너무 좋아서 쉽게 떠날 수 없다고..
하긴, 나만해도 정말 떠나기 싫은 이 곳. 떠나면 너무 그리울거다.
향교를 보고나니 벌써 점심시간.
나주 곰탕 거리에서 맛이 끝내주는 곰탕집을 찾았다.
나주는 배도 유명하지만 곰탕도 매우 유명한 곳으로 나주목사내아 인근에 나주곰탕집이 길게 뻗어있다. 이곳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곳은 탯자리집. 나주곰탕이다. 맑은 국물에 계란 고명이 살짝 얹어있는 곰탕은 매우 짜지도 많이 싱겁지도 않은 적당한 국물간에, 밥을 따로 시켜 말아 먹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곰탕안에 밥이 투척되어있다. 밥이 꼬들꼬들하게 잘 되어있어서 그런지 후루룩후루룩 잘 넘어간다. 같이 나오는 깍두기와 묵은지가 정말 일품인데 깍두기는 너무 짜지않고 아삭아삭 씹는맛이 좋고, 묵은지는 최소 10년된 묵은지인데 묵은지와 곰탕의 궁합도 환상이다. 고기 고명은 적지도 않고 오히려 많다 생각할 정도.
곰탕을 먹고 나서 나주목을 다스리기 위해 파견된 목사가 기거하던 곳인 나주목사내아에 들러 주변을 산책한다. 잘 가꾸어진 목사내아는 한창 청소중이었는데 아주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나중에 또 한번 나주에 들른다면 꼭 목사내아에서 묵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이다.
조금씩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우리는 영산강을 쭉 따라가 승촌보를 지나 호가정을 찾았다. 호가정은 조선 중기 문신 유사가 지은 정자로, 호가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송나라의 소강절이 말한 '호가지의'에 담긴 뜻을 취한 것이다. 영산강을 굽어볼 수 있는 이 정자에서 마지막으로 바람과 갈대 스치는 소리를 박자 삼아 마지막 아쟁연주가 시작되었다. 색다르게 외국곡 Fly me to the moon과 다양한 민요들이 줄줄 흘러나온다. 우리는 콧소리로 흥얼흥얼 따라부르며 1박 2일간의 여행을 추억한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아마 사람이 아닐까 한다.
어르신들의 넘치는 정과 그것을 통한 배움, 그리고 우리 청춘들과 여행하면서 나 또한 많이 배우고 있다.
그들의 열정 뿐만 아니라 속 깊은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배우려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예쁜지 모르겠다.
광주와 나주를 떠나며, 아름다운 그곳 영원히 그자리에 그대로 남아있기를. 그리고 이곳을 찾는 많은 청춘들이 우리처럼 사람과의 정과 소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청춘은 고이지 않고,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