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4시 30분이 되어, 일어났다. 그날따라 아저씨들이 괴성을 질러주시는 까닭에 잠을 설치긴 했지만, 에라 그래도 덕분에 일찍 일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나섰다.

사실 너무 일찍 서두를 필요는 없는게 대청봉이 딱 30분거리도 안걸리는 곳에 위치해서 지리산처럼 어느정도의 산행을 요할 수준은 아니다. 바위를 조금만 오르면 만날 수 있는 대청봉. 천천히 아침 공기를 마시면서 설악산 대청봉으로 향했다.

일출시간은 대략 5시정도, 구름이 제법 꼈던 날씨라 그런지 크게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출을 보며 소원을 빌고 싶은게 있었다. 항상 집걱정, 가족걱정. 모두 대성했으면 하는 올해의 바람.





빼꼼히 일출이 구름 사이로 활짝 빛난다. 아름다운 일출을 보면서 준비해 두었던 소원을 하나하나 머리에 떠올리며 기도했다. 아주 완벽한 일출을 기대했던것도 아니라서 이정도의 일출도 아주 값진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연신 우와를 연발하며 어떤 아저씨는 맥주 한캔을 가지고와서 쭉 들이키시더라. 그 맛을 알지 못하는 나는 다음 산행때는 꼭 품에 맥주 한캔을 들고 오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쓰레기는 다시 가져가야지.


결국 설악산 정상을 오르겠다는 염원도 이루어냈다. 어렸을 때 꼭 오르고 싶었는데 몸도 약하고 해서 쉽게 도전할 수 없었는데 성인이 다 되어서야 가능했던 대청봉. 대청봉 다음으로 우리는 오대산을 다음 목적지로 정했다.


정상에서 내려가기가 싫어서 한 30분간을 계속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진을 찍거나 아니면 바다를 보면서 멍하니 생각에 잠겨보는 것도 나름 짜릿한 경험이었다. 집에만 있으면 분명 다시 퍼질테고, 도서관에 있노라면 도서관 나무 책상을 보며 생각에 잠길텐데 이렇게 산 정상에서 맛보는 짜릿한 고뇌는 참으로 뼈와 살이 되는 순간이다. 인생에 있어서.


전날 잠을 쉽게 들지 못해서, 30분정도 산장에서 못다한 잠을 잤다. 그리고 나서 직원의 독촉에 의해 일어나니 벌써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더라. 친구는 어차피 이제 나무 데크로 된 계단의 연속이라 편하게 내려가면 된다고 하고 계곡 길이라 볼 것이 많다고 즐기며 내려가잔다.

일단 허기부터 채워야했다. 집에서 준비해간 라면을 취사실에서 끓여먹었다. 알싸한 라면스프냄새에 정신을 차리고 어제의 햇반은 왠일인지 잘 익지 않아 라면에 풀어서 먹었다. 옆에 있는 아저씨가 남은 소주 한병을 들고가라 권하셨는데 아침부터 라면과 함께 비울 수 없어 거절했다. 나중에 비선대에 왔을 때 그 소주 들고 올껄 내심 아쉬웠다.

오늘 첫번째 쉼터는 회운각 대피소. 소청을 에둘러 갔다가 내려가면 나오는 곳으로 회운각 까지 가는 절경이 아주 끝내줬다. 아침이라 그런지 산안개, 운해가 잔뜩 껴있는데 마치 킬리만자로 고봉에 온 듯한 분위기가 났다. 에어컨 바람보다 시원하고 습기도 적당해서 좋아했던 나무 데크길. 굽이굽이 능선도 보이고 저 멀리 바라보면 공룡능선도 보인다. 지도에서 빨간색 루트로 숙련자 코스라 되어있는 그 길. 다른 산을 좀 더 올라보고 도전해볼테다.

한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정도 가니 이윽고 나오는 회운각 대피소. 도착하자마자 물 한통을 비우고 또 다시 잠이 들었다. 어차피 천천히 하산해도 되는거라 아무 걱정이 없다. 어쨌든 제시간에 도착할 수는 있으므로.

회운각으로 향하는 길에 물소리가 조금씩 들려오면서 또렷히 들릴 때 쯤 만날 수 있는 회운각 대피소는 산행에서 처음으로 시원한 물을 채울 수 있는 곳이다. 중청 대피소의 경우는 아무래도 물탱크에서 나오는 물이라서 물 맛이 달랐는데 회운각 대피소의 물 맛은 좀 더 비릿한 맛이 없더라. 신나게 잠을 자고 나는데 어디서 많이 보던 아저씨 무리들.

알고 보니 우리가 첫날 능선에서 뵈었던 아저씨들. 그중 한분은 분당에 사시고 너무 유쾌하셔서 우리끼리 '분당아저씨'란 별명을 붙여드렸는데, 이 아저씨들도 참 천천히 산행하시는구나. 우리도 그에 못지 않게 천천히 산행한다 생각했는데 이 아저씨들은 거의 종결자다. 무조건 계곡만 보이면 한 2시간은 쉬시는 듯 하다. 맨 마지막 사진은 엎치락 뒷치락 산행하다 자꾸만 만나는 그 아저씨들을 도촬. 뭘 가져오셨는진 모르겠지만 계곡에서 먹고 마시고 물장구 치고 천천히 산행하시는 듯 하다.




회운각 대피소를 나서면, 공룡능선으로 갈라지는 길이 있다. 왠만한 산악회 분들은 바로 내려가지 않고 공룡능선을 통해 비선대로 향하시는 듯 하다. 그날 따라 백두대간을 종주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어그제까지 비가 왔던걸 감안하면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 아닐 수 없다. 젊디 젊은 나도 엄두를 못내겠는데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올까. 대단하다.





산을 내려가는 내내 끝없는 감탄사와 비경이 쏟아져 나온다. 한계령에서 중청으로 갈때보다 더욱 볼것이 많은 계곡루트. 그중 폭포의 제일이라 느끼는 곳은 바로 천당폭포.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고 싶지만, 물이 생각보다 너무 차다.
발만 담구고 있자니 피로가 싸악 풀리는 듯 하다.






하산하는 길은 대부분 나무데크로 이루어져 있어서 수월하다.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고 발끝에 힘을 모으고 산행하면 무리 없이 내려올 수 있다. 중간중간에 만나는 계곡에 피로도 풀고, 하하호호 하면서 쉽게 내려올 수 있는 길. 반면에 이쪽으로 올라오는 길이라면 무릎이 많이 아플 듯 하다.


어렸을 때 설악산을 세번 왔었다. 한번은 속초로 가는 김에 비선대에 잠깐 들렀다 오자며 갔었던 기억. 한번은 토왕성폭포를 찍고 왔었고 한번은 중학교 수학여행으로 왔던 기억이 난다. 당연하겠지만 그때 기억의 그 풍경들이 아직도 살아있는 듯 하다.
내려오면서 느끼는것은 다른 산들보다 외국인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것. 속초 버스터미널에서도 외국인 관광객을 많이 봤었는데 여기서도 단체 혹은 개인으로 온 외국인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중청에서 만났던 외국인은 무려 올라가면서 우리에게 먼저 인사도 건네었다.

헬로~가 아닌 "수고하십니다" 로.
산 좀 타보신 양반인 듯.




나무데크가 조금씩 모습을 감추고 돌길이 시작될 즈음 만날 수 있는 양폭대피소. 이제 비선대에 거의 다 왔다는 이야기다. 어린 아이와 함께 산을 오르는 가족들은 소공원에서 입장하여 양폭대기소까지만 오는 듯 하다. 우리는 비선대의 막걸리가 눈에 아른거려 쉬지 않고 다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우린 여지없이 분당아저씨를 만난다. 또 물장구 치고 계시는구나 저분.


양폭대피소에서 한 한시간 정도 걸었을 까 드디어 친구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야! 다 왔다. 드디어 비선대다!"

아 정말 오랜만이다. 저 빨간다리와 풍경들. 그리고 내가 묵었던 2층 산장방. 어렸을 적 기억이 물씬 난다. 부모님은 아파하는 날 2층에 뉘여놓고 아마 막걸리를 들이키셨겠지?

이제 내가 막걸리를 들이킬 차례가 되었다.


이렇게 파전과 막걸리를 시켜서 시원하게 한잔. 막걸리는 또 호기롭게 시킨다고 대짜를 시켰다. 역시 파전은 해물파전이 갑! 우리가 주문하니 옆 테이블 할아버님들도 같이 해물로 시키셨다.
또 옆 테이블에는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저게 뭔가 하며 쓱 훑어봐서 해물파전을 추천해줄까 생각했는데 이내 라면을 시켜 먹더라.

에이, 여기선 그래도 파전이 갑이제~

우리는 계속 주거니 받거니 막걸리를 부어라 마셔라 하며, 파전을 찢어나간다.


막걸리에 흠뻑 취해서 비선대를 나서는 길. 친구말처럼 취해도 잘 걸을 수 있는 평탄한 길이다. 문제는 아주 취하면 이것도 비탈길로 보이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더 취하면 이 땅바닥이 하늘로 보일 수 있다는 것에 주의.


우리 뿐만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비선대에서 흠뻑 취해 비틀대며 길을 어깨에 이고 걸으시더라.




신흥사 대불에서 한 컷.
이제 얼굴에서 고단함이 느껴진다. 빨리 집에가서 쉬어야지!



드디어 도착한 소공원 입구! 일단, 화장실에서 텁텁해진 이를 좀 닦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나 감격스런 순간이다. 아름다운 절경을 맘껏 느꼈고 계곡을 느끼고 구름가는 데로 움직여서 도착한 이곳. 우리는 또 한번의 성취감을 만끽한다.
친구와 함께 등산하고 나면 항상 사는 2천원짜리 등산지도 손수건을 사들고, 옆에서 대청봉 케이블카 반대 서명을 했다.
대청봉에 무슨 케이블카라니.. 그 좁은곳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거리거나 제한을 한다해도 일반 등산하는 사람은 그곳에 닿기 더 어려워질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을 파괴해가면서 까지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속초로 향하는 길 우리는 닭강정을 먹기 위해 중앙시장으로 가는 버스(7-1)를 탄다.


중앙시장으로 다시 들어서서 먹은 만석닭강정은 정말 꿀맛이었다. 게다가 약간 식은뒤에 먹으면 더욱 감칠맛 나는 닭강정. 이걸 싸들고 속초 터미널 앞 편의점에서 맥주 두캔을 사서 호기롭게 뜯었다.
시원한 청량감이 감도는 맥주와 치킨이라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수원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잔뜩 취기가 오른 우리는 바로 잠이 들었다.




미시령 고개를 넘어 왔고 설악산에 가서 힘을 잔뜩 얻어서 다시 미시령 고개로 넘어간다.
당분간 또 기억에 머물게 될 설악산에서, 다시 힘을 충전하고 간다.

그때의 추억들과 그때의 사람들을 기억하며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한동안 같은 패턴의 삶을 이어갈 것이다.

언제 한번 오자. 다시 한번.
그곳에서 다시 힘을 모아보자. 안녕 설악산!



굽이굽이 넘고넘어 좋은 풍경을 보고, 좋은 생각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하는 여행은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돌아오는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보통 여름이 되면 시원한 바닷가로 계곡으로 피서를 떠나기 마련이지만,
산으로 피서를 떠나는 건 어떨까요.
어찌보면 이열치열이기도 합니다만,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있고
시원한 계곡도 있습니다. 게다가 성취감도 느끼고 생각을 정리할 수가 있죠.

여러분이 산에서 흘리는 땀 한방울 한방울이 여러분을 더 강하게 해줄 것이라는 것은
제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올 여름! 산으로는 어떠세요?!


날짜

2011. 8. 5.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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