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영국을 가려던 것은 아니었다. 외국에서 살아보자는 꿈은 어렸을 때부터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그것이 현실화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린맘에 토이스토리를 보면서 저런 집과 저런 풍경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하던 것이 사실상 뉴욕여행을 무작정 떠나서 2개월동안 방을 잡고 살아보기로 결정한 것과 연결되었듯이 뉴욕에서 느꼈던 언어장벽을 뚫어보고 싶은 마음때문에 워킹홀리데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혹자는 왜 하필 워킹홀리데이냐고 되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말 그대로 Case by Case로, 잘해야 본전치기지만 보통은 영어를 배우는것과 일하는 것을 절대 병행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나에게는 워킹홀리데이 말고의 대안을 찾기가 힘들었던 때였다. 그러니까, 집안 형편상 외국 공부 시켜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두번째로 교환학생을 신청하고 싶었지만 편입생이고 막 편입해서 공부를 시작한 단계였기 때문에 제한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장학금을 받아서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사실 남의 돈을 받아서 공부하는 거면 조금 늘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장학금을 내 손에 쥐어주는 곳은 사실 별로 없기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겠는데, 나는 적어도 긴장속에서 뭔가를 해야 성과가 잘 나오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것이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었다. 나름 뽑는 인원도 한정적이었으며 그 넓은 영토에 맘만 먹으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질 수 있고, 무엇보다도 미국이 가깝기 때문에 미국여행도 병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차근차근 서류를 준비하기로 했다. 4학년 1학기를 병행하며 모든 서류들을 영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직접 했다. 여러 블로그에 있는 참고사항을 모두 숙지하고 꽤 그럴듯한 서류 패키지를 만들어내고 드디어 캐나다 대사관에 송부할 차례만 남았다. 그때는 우체국 앞에 줄을 서서 선착순으로 접수한대로 비자를 내어주는 형식이었다. 대사관에서는 2012년이니까 2012명을 뽑겠다고 공지를 해놨었는데 그 인원 안에 들기가 생각보다 많이 팍팍했다. 오전 09:00 정시에 접수를 해야지 2분전이나 1분전은 무조건 탈락(Early Admission), 2분 이후도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집 앞에 있는 허름한 우체국(이라 부르고 취급소라고 읽는다)에 가서 접수를 준비했다. 아무래도 내가 사는 곳이 '리'단위의 동네다 보니 경쟁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우체국 직원은 오늘 접수인 것을 알고 있었다며 당연한 듯이 "정시에 접수해드리면 되죠?" 라며 내 목표를 꿰뚫어보더라.


카운트다운을 함께세며 09:00가 되자마자 직원은 찰지게 엔터를 쳤고, 송장이 나왔다. 그런데 그 송장 스티커에 보니까 08:58분으로 찍혀있다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띵... 분명 핸드폰 시계와 모든 시계는 08:58분이었는데 대체 무슨일인가 싶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컴퓨터 시계가 08:58분으로 셋팅이 되어있어 그랬었을까? 


직원은 마치 자기 일인양 "어떻게 하죠? 정말 미안해요"를 연발하며 사과를 했다. 글쎄 그 상황에서 내가 사과를 왜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이것 또한 운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래도 속이 쓰렸지만 "괜찮아요"하고 멋쩍게 웃으며 우체국을 나왔다. 


우체국을 나오는데 그냥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침 일찍 내게 커피도 내주시고 이런저런 얘기도 해주셨었는데 그런 분에게 괜히 오늘 하루를 찜찜하게 보내게 해서는 안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옆에 있는 슈퍼에서 박카스 한병을 사서 전해드렸다. 


"저 정말 괜찮아요. 아마도 크게 문제 없을거에요. 여기서 편입할때 서류도 접수한 적 있었는데 그때 그 학교 합격해서 잘 다니고 있어요 . 그러니까 아마 이 비자건도 문제 없이 잘 진행될거에요"라고 말씀드리고 나왔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 왔지만 그래도 열심히 준비했던 것인데, 조금은 마음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졌다. 인터넷을 서성이며 제시간에 접수하지 못한 많은 지원자들의 댓글을 보다가 다른 대안을 찾기 위해 다시 인터넷 바다로 떠났다. 


검색에 검색을 거듭하는데 우연하게 영국대사관 홈페이지를 들어가게 되었고 기사를 찾아보던 중 영국과의 워킹홀리데이가 발효될 단계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기사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그 정보를 탐색하였고 이윽고 우리나라가 영국과의 YMS (Youth mobility scheme)제도를 시행하기로 했으며 7월에 모집한다는 공고가 함께 뜬 것을 확인했다. 


첫회는 500명을 뽑는다고 공지가 되어 있었으며 2년동안의 기간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고 나는 정말 운이 좋은 놈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방방 뛰었다. 영어로 말하는데 1년이라는 시간이 사실 좀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는데 2년인데다가 풀타임 잡을 얻을 수 있고 호주처럼 6개월간 옮겨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영국은 영어의 종주국인만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5장 분량의 자기소개서와 함께 지원을 완료했다. 


그렇게 영국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마침내 500명 안에 선발되어 영국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원 해놓고 거의 1개월 동안을 끙끙앓고 노심초사 했었다. 영국까지 가지 못하면 얄짤없이 졸업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국내여행을 혼자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에게서 지혜를 얻었던 만큼 영어를 의사소통에 문제없는 수준까지 만들어 외국에서 똑같은 지혜를 얻고 싶었던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선발이 되고 나니 너무 얼떨떨했다. 즉시 학교측에 휴학 통보를 내고 1년도 아니고 2년동안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나름 그때 당시 나이가 27살, 또 다시 2년이란 시간을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이지만 그래도 뭔가 그곳에서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좀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문제는 비행기였다. 남대문에서 비자를 발급받고 바로 항공권을 신청하려고 이곳저곳 검색해 보았다. 그냥 런던으로 가면 될 것을 나는 일거양득한다는 생각으로 또 경유지를 탐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크게 두가지 루트를 고민하고 있었다. 두바이를 들렸다가 가는 방법, 아니면 태국 방콕을 들렸다가 가는 방법이었다. 두바이를 들렸다가 가게 되면 10만원의 저렴한 가격으로 두바이를 여행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은 방콕의 '카오산 로드'를 참 가보고 싶었다. 거기에 더불어 머리만 잘 굴리면 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 와트에 다녀올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겐 그 흔한 10만원이 부담스럽게 다가왔고 두바이에 자주 다녀온 적 있는 친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이런 계획이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며 의견을 구했다. 


그런데 그 형은 마침 집근처를 지나던 길이었고 우리집에 찾아와서 잠깐 맥도날드를 가자고 데려가더니 안그래도 출장을 다녀오면서 100불이 남았는데 이걸 주려고 들렸다며 100불을 내게 주었다. 


"그냥 고민하지 말고 방콕으로 가, 어차피 그쪽으로 마음 굳혀진거 아닌가? 이거 100불이면 그걸로 선택할 수 있을거 아냐" 


그렇게 나는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를 그날 예매했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 형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어떻게 갚아야 할 지 계속 기회를 노리는 중이다) 


내게 방콕의 이미지는 카오산로드와 맛있는 먹거리, 여행자의 낙원이라는 이미지였다. 거기에 어렸을때 툼레이더를 하면서 그 배경이었던 앙코르와트에 심취했었으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고 생각했는데 겸사겸사 갈 수 있게 되었다. 쿨하게 7일정도 스탑오버를 신청했다. 





그렇게 모든것이 진행되어 있을 즈음,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아예 잊고 있었는데 메일이 하나 날라왔다.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이게 뭔가 싶었다. 그렇게 마음 졸이던 캐나다 워킹홀리데이까지 합격하다니... 그러나 주사위는 영국으로 던져졌고 나는 9월에 떠난다. 이제는 미련이 하나도 없다. 


한가지 웃긴 얘기를 하자면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준비하면서 운전면허시험까지 같이 보고 있었다. 계속 질질 끌고 있긴 했었는데 게으름에 대한 변을 얘기하자면 학교에서 신청해서 배정해 준 학원이 의정부였다. 그런데 우리집은 경기도 오산. 오산에서 의정부까지 왕복하는데 거진 4시간 이상이 걸리는, 그까짓 운전면허 보려고 아주 여행을 해야한다. 비행기 출발일은 점점 다가오고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출발일 3일전인가 시험을 봤는데 결국 떨어진 것이다. 나름 준비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시험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바로 출발일 당일 오전밖에는 없었다. 다시 보겠냐는 질문에 "예"라고 답한날이 출국날 오전이라니.. 아아 기구하도다. 


하... 나란 놈은 정말이라고 생각했다. 

울 엄마 왈, "진짜 너는 구제불능이다" 


가족과 출국 전 단란한 식사는 다 팽겨치고 바로 의정부로 달려갔다. 2년동안 생활할 짐은 여행의 노하우가 베어있어서 그런가 거의 1시간 안에 모두 싸놓았다. 의정부에서 긴장한 상태로 시험을 보니 제대로 볼 수 있었을까? 결론은 


또.... 떨어졌다. 


거의 수강료와 시험비만 50만원 넘게 들었는데 다시 돈을 내기 싫으면 1년 안으로 다시 한국을 들어와서 봐야한단다. 죽어도 1년 안에 돌아 올 마음은 없다. 50만원... 그래, 나도 실패를 많이 해봤으니까. 이걸 50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컨텐츠로 만들어 낼거야 마음을 먹으며 애써 긍정한다.


그날 시험에 떨어지고 장어를 먹으러 갔는데 가족들이 낄낄댔다. 제대로 멍청한 놈이 여기에 있었다며 저격하는 것이다. 장어를 먹는 시간은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내 비행기는 18시 30분, 바로 인천공항으로 내달려 인사도 제대로 못해보고 그렇게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미지의 세계로,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예상도 하지 못한 채 부모님께 짧은 인사를 드리고 2년간 타국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비행기가 한국땅을 박차고 올라 공중에 뜨자 외로움이 시작되었다. 


에이씨, 내가 언제 외로움을 느낀적이 있었는가. 다시 시작해보자. 





날짜

2015. 2. 15. 11:52

최근 게시글

최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