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6/2014 (Day 9) Najera -> St domingo

 

아침 일찍 일어나 기봉이와 간단한 밀크티를 마셨다. 평소 영국에서 쟁여온 홍차가 있어 늘 우유와 함께 밀크티를 해먹었었는데 은근히 까미노에서 해먹으면 반응이 좋았다.

 

나헤라를 지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와인밭과 밀밭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풍경에 나도 모르게 신이났다.

햇살은 엄청 따갑지만 바람이 솔솔 불어 그렇게 덥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 앞서가고 있던 프란체스카는 앞으로 와인밭은 없다고 울상이다.

 

길을 걸으며 간만에 프란체스카, 기봉과 나. 이렇게 한국어로(?) 한국 음식을 얘기한다. 나도 한국을 떠나온 지 2년이 되어가고 있으니 진짜 레알 한국음식이 그리운 건 당연하다.

 

프란체스카도 매운 음식이 그립다며 쭈꾸미는 처음에 엄청 매웠는데 이제 쭈꾸미 삼겹살이 그리워진다고 했다.

 

"캬~ 그치 쭈꾸미 삼겹살에 소주한 잔 마시면 정말 좋지이~"

 

우리는 입맛을 다시면서 한국을 추억했다.

산티아고 길의 끝이 다가오는 걸까? 아직 눈 앞에 그 곳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만으로는 계속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앨리스와 프란체스카는 못다한 이야기가 있는지 살짝 우리가 빠져주고, 기봉이와 함께 앞서 걷는다.

 

"형 어쩌면 이렇게 풍경이 좋을까요?"

 

 

사방이 탁 트여있는 풍경에 우린 넋을 놓고 걷는다.

오후가 되어 태양이 머리 위로 뜨니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다. 뒤따라오는 마르타의 노래소리에 같이 몸을 흔들어대며 더 힘내서 걸어본다.

(사진을 찍게 만드는 멋진 풍경들)

(앞서 걷는 기봉. 기봉이의 가방커버가 워낙 파란색이라 눈에 잘 띈다. 왜 비도 안오는데 커버를 씌우나 궁금했는데 가방이 고장나서라고..)

(이런 평원을 눈에 담아보니.. 몽골인들의 시력이 좋은 이유를 알겠다. 뭔가 눈에 피로도 적고 시력을 100% 이용하는 느낌이랄까)

(혼자서도 이제 잘 걷는 나)

(기봉이에게는 오늘 하루는 혼자 쭉 걸어보고 다음 마을에서 만나자고 했다)

 

바람이 정말 시원하다. 푸른하늘과 초원이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과 만나면 춤을 춰댄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고 걸으며 여러 상상을 해본다.

 

한국에 돌아가서 마지막 학기는 어떻게 보낼까?

그리고 난 뭐 먹고 살지?

 

혼자서 상상하며 장미빛으로 펼쳐질 내 미래에 푹 빠졌다.

 

잠깐 여행기를 쓰다가.. 든 생각 (일기 밖으로)

'모두가 취업을 준비하는 나이 27살에 나는 영국 워킹홀리데이 2년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떠났다. 그땐 정말 패기가 넘쳤던 것 같다. 까짓거.. 한국 돌아와도 더 잘될거야 라는 이유없이 자신감이 넘쳤다고 할까. 오히려 2년을 더 잘보내는데에 촛점을 두고 더 야무지게 배우고 깨닫는 과정을 거쳤다.

 

나를 담당했던 매니저도 늘 너는 아마존에서도 살아남을거라고 했었는데...

걸으면서도 늘 그 생각뿐이었는데

 

2016년의 나는 뭔가 그때보단 패기도 자신감도 한단계씩 떨어진 것 같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지금도.'

 

아무튼 길 위에서는 나는 온전히 자신감이 넘치던 나였다. 20대 부릴 수 있는 패기의 한계를 모두 끌어 모았던 것 같은.

 

 

(중간에 작은 마을이 있다. 순례자를 나타내는 조형물)

(무슨 이유로 여기에 서있을까)

(이곳에도 작은 알베르게가 있는 것 같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면서 계속 걷다가 건초더미를 만났다. 마침 기봉이도 서있고 누군가 옆에 있어서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이들은 덴마크에서 온 부부라고 했다. 내일 다시 덴마크로 돌아가는 이 부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까미노를 조금씩 걷는다고 했다.

 

그리고 돌아가기 전에 우리 같은 젊은 순례자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꼭 해주고 싶다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봐 까미노에는 7가지 염두해두면 좋을 것이 있는데 특히 강조하고 싶은게 있어. 조용히 걸어볼 것, 따로 또 같이 걸어볼 것이야. 조용히 걸으면 온전히 나에게 빠져들 수 있고, 주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점. 그리고 따로 또 같이 걸어보며 서로 의지를 주고 받으며 걷는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얻을 수 있어"

 

그의 말이 맞다. 지금도 조금씩 느끼고 있는 점이지만 서로 의지를 한다는게 얼마나 중요한 지, 소소함에 집중하는 점을 알아가고 있는 점에서 크게 공감이 갔다.

 

 

꽃과 들이 흐드러진 평원을 걸으면서 글쎄 나는 여행을 도전으로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한국에 돌아간다면 사람들에게 '여행이요? 도전하세요!"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인가?

 

글쎄.. 도전이라는 것 어떻게 보면 참 패기있고 좋은 말이다. 여행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얻는것도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내가 느낀 여행은.. 도전이 아니라.. 그저 소소함의 행복을 깨달았다는 점이었다.

 

많은 나라를 계획성 있게 갔다온다. 혹은 무전여행으로 다녀온다. 이것은 도전적인 측면으로 볼 때 정말 박수칠 만큼 멋진 실행력이지만.. 나는 그런 여행도 해보고 이렇게 진득하게 길도 걸어보니까..

 

진짜 행복한게 뭔 지 조금씩 배워가는 것 같다. 사소함에 감사하는 법, 웃음 짓는 법, 사람들과 온전히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 사람에게 뭘 얻겠다.

내가 줬으니 받아야지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그냥 이 사람이 좋아서, 의지가 되서 소통하는 그런 방법이 되었던 것 같다.

 

아 제길, 너무 추상적이다.

길을 계속 걷는다. 나에게 이 길은 어떤 의미지? 라는 질문보다..

오늘 산토 토밍고로 향하는 이 길 위에서 그냥 나는 걷는 행복, 사람 만나는 행복 그걸 느끼고 있다.

길 위에서 뭔가 기대하지 말라는 EL의 이야기.. 정말 이제 뭔지 알 것 같다.

이 멋진 까미노 길. 정말 무지막지하게 길다보니 참 별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다음에 계속)

날짜

2021. 5. 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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