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6/2014 (Day 10) St domingo -> Belorado
까미노를 걸은지도 벌써 10일째가 되었다. St domingo 에서 벨로라도까지 가는 길. 아침 일찍 길을 나서 산 도밍고를 빠져나온다.
이제 앞으로 까미노에서는 유쾌한 마르타를 볼 수 없다는게 매우 아쉽다.
새벽녘의 길은 느낌이 참 좋다. 벨로라도 가는 길은 생각보다 평평한 길이 계속된다. 저 멀리 보이는 구릉을 지나면 평평한 길이 계속되기에 풍경도 정말 아름답다.
다음 마을을 들르기 전, 앞서가던 비올레타를 따라잡았다.
"오올~ 오늘은 빨리 나왔네? 로이?"
"그러게 간만에 기분이 상쾌해서~"
조그마한 마을에 자리잡고 비올레타와 함께 까페콘레체를 한잔 마신다. 약간 살얼음이 낀 몸에 따듯한 커피를 마시니 금새 녹아버릴 것만 같다.
언덕을 지나니 어느새 레온주로 들어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제 한 1/3 정도 왔구나. 꼭 반지원정대 처럼 산티아고를 도착하기 위한 뭔가 대 서사시 같은 느낌이 든다.
벨로라도 까지 가는 길에는 어제 함께 사진을 찍었던 이탈리아 엉클들도 있었다. 어제 이후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아저씨들은 아무래도 부르고스까지 가시는 것 같다.
늘 나보다는 항상 앞서있는 비올레타.
오늘 길 위의 주제는 그리운 한국음식을 읊는걸로 시작됐다. 런던에서 2년간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했지만 나름대로 한국음식들은 야무지게 만들어서 먹었었다. 떡볶이는 정말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어서 날 잡고 만들고 싶은데 도무지 떡과 어묵을 구할 방법이 없다.
"햄이 얼마나 맛있게 하는지 먹고 싶어지는데요?" 기봉이가 정말 먹고 싶어했는데, 그럼에도 증명할 방법이 없구만..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여러가지 주제로.. 그것도 그렇게 심오하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며 걸어본다. 모두와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참 의미가 있다. 말하다보면 서로 맞는 관심사를 끊임없이 찾아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알 수 없는 쥐 모양의 .. 폭발물 표시 (?)
오늘 길 위에는 정말 아기자기한 마을들이 많다. 지나가다가 너무 예뻐서 찍은 집.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고 이렇게 아름다운 집들과 짹짹 울어대는 제비소리. 내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스페인의 가장 짙은 모습이다.
벨로라도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여정이다. 중간에 목이 말라 길가에 있는 와인바에 들러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시원한 콜라를 시켜 오랜만에 농도높은 탄산의 즐거움에 빠져본다. 잠시 바깥에 나와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 바는 대체 뭐하는 바냐고 물어봐서 열심히 호객행위(?)를 했다. 그 중에는 기봉과 일전에 몇 번 만난적이 있다는 이탈리아인 귀도 아저씨도 있었다. 예전에 와인샘에서도 만났던 이 아저씨는 그간 기봉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고. 정작 아저씨는 영어를 전혀 못하시지만 우리는 이제 까미노 위의 통역가가 된 것 마냥 바디랭귀지로도 의사소통을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벨로라도까지 앞으로 2km 정도 남았다. 열심히 여유를 부려볼까하여 마지막 2km 는 걸그룹 노래를 들으면서 폴짝폴짝 뛰었다. 내 청춘(?)을 함께 보냈던 1세대 걸그룹 S.E.S. 의 노래.. (실제로 지금까지 19년째 팬이다) 그리고 기봉이가 좋아하는 아이유 노래를 들으면서 걸었더니 2km 가 2m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벨로라도에 머문다. 너무나 빨리 도착해서 12시도 되지 않았는데 벨로라도가 보인다. 우리가 제일 빨리 도착했군! 하고 참 좋아했는데 론은 이미 도착해서 빨래를 하고 있다.
다들 왠만해서는 municipal 공식 알베르게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냥 예정대로 도네이션 알베르게에 머물기로 했다. 많은 독일인과 스위스 사람들이 찾는 이 알베르게, 정말 친절한 호스피탈로가 말하기를 스위스의 어느 기업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아침에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 우리는 점심을 직접 해먹기로 했다.
"기봉아 뭐 먹지?"
"햄! 간만에 라면스프 파스타 어떻슴까!"
"좋지!"
일단 도네이션 알베르게에 있는 것들을 체크한다. 파스타면도 있고 계란도 몇개 있다. 라면 파스타 하기엔 아주 충분했다. 그리고 시에스타에 돌입하기 전에 슈퍼마켓에 가서 와인 한 병과 맥주를 사들고 와 요리를 시작했다.
우리끼리 먹으면 프란체스카가 서운해 할테니 문자를 보냈다.
<프란체스카 언제쯤 와?>
<10분 남았드아>
좋았어. 지금 만드는게 좋겠군. 열심히 계란을 풀어 스크램블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음식을 만들던 도중 알베르게에는 또 다른 팀들이 도착하고 있다. 빼빼마른 동양남자 둘이 음식을 하고 있으니 쟤들은 대체 뭘하고 있는거지 궁금할 법도 하다.
특히 영국 억양을 가진 부부들이 관심을 갖고 부엌을 찾았는데, 영국 억양을 듣고 단번에 영국사람임을 알았다.
"영국에서 오셨군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와우 어찌 알았나요?"
"저 런던에서 베이커리 캐셔 했었으니까 억양은 잘 구분하죠!"
"오! 우리는 코벤트리에서 왔어요"
알고보니 토니라고 하는 아저씨는 영국 분, 존이라는 부인은 스코틀랜드 사람이었다. 이 두 지역은 서로 디스를 엄청나게 하는지라 이야기 중간에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정말이지...'라는 뉘앙스의 표현으로 서로 농담을 주고 받는게 참 웃기다. 그럴때마다 존은 스코틀랜드 사람의 자부심으로.. 열심히 스코틀랜드 자랑을 늘어놓는다.
즐겁게 한바탕 인사가 끝나고 하니 이 부부와 함께 여행하고 있는 독일 분 한분도 있었다. 존과 토니 부부와 함께 프랑스 길(프랑스 남부 길)을 걷다가 마음이 맞아 같이 걷고 있다고 했다. 이름은 토마스. 독일 서부 블랙포레스트 지방에서 왔다.
옷을 어느정도 정리하고 토마스는 요리하고 있던 우리에게 와서 물었다.
(잔뜩 배가 고픈 표정으로) "이 근처에 슈퍼마켓 어디있어요?"
"아아.. La Caixa 은행 근처에 있긴한데.. 그게 지금 시에스타 시작해서 문 닫았어요.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었거든요"
(풀이 죽은 표정으로..) "아아... 그렇군요.."
누가봐도 정말 배가 고파서 슈퍼마켓을 찾고 있었던거다.
"(한국말로) 기봉아 이 아저씨 뭔가 되게 배고파서 그러는거 같지? 우리 어차피 파스타면도 많은데 이 아저씨것도 같이 해서 주자"
"좋죠!!!"
"저기 토마스, 배고픈거라면 우리가 지금 한국식(?) 파스타를 하고 있는데 드릴께요. 면이 좀 많이 남아요"
"아?! 진짜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때마침 프란체스카도 도착했다. 알베르게 수용인원은 15명 정도라서 일찍 마감되는데 운 좋게 프란체스카가 마지막 손님이 되었다.
"스크램블 파스타인데.. 조금 매울수도 있어요"
"음! 맛있는데요?"
우리는 이 파스타와 와인, 맥주를 함께 마시며 (낮술..) 서로 더 친해질 수 있었다. 마침 프란체스카도 독일사람이라 독일어로 오랜만에 말할 기회였고, 한국어로 대화하는 프란체스카를 경외의 눈빛을 쏘며 바라봤다.
이 계기로 토마스와 친해졌는데, 우리는 그때만해도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은 배려가 정말 큰 인연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시초가 될 줄은 몰랐다.
다음에 계속.